김상옥 의사님의 사진



김상옥 의사님의 생년월일: 출생(1890년 1월 5일)

사망(1923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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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 의사님의 인생

1890년 1월 5일 한성부 동부 건덕방 어의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에서 구한 말 군관을 지낸 아버지 김귀현(金貴鉉)과 독립유공자인 어머니 김점순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한학을 수학하는 동시에 어의동보통학교를 다녔다. 14세부터 낮에는 철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1910년 경성영어학교를 다녀 국제 정세와 서양 문화에 안목을 넓혔고, 1912년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영덕철물상회'를 경영하였으며, 1913년 정진주와 혼인하였다. 1917년 물산장려운동과 일화(日貨)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를 위해 말총모자를 창안하고 생산해 보급하였으며, 농구, 장갑, 양말 등도 생산해 지방을 순회하면서 국산품을 장려하는데 앞장섰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 운동 이후부터였다. 1919년 4월 동대문교회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간해 독립 사상을 계몽하고 고취하였다. 1919년 12월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및 친일민족반역자에 대한 응징 및 숙청을 기도하였고, 1920년 4월 한훈, 유장렬 등과 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민족반역자 서씨 등을 총살하였으며, 오성헌병대분소를 습격해 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 1920년 8월 24일, 미국 의원단이 동양 각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1920년 5월부터 김동순, 윤익중, 신화수, 서대순 등의 동지를 지휘해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었고, 동지들이 붙잡혀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했으나 여의치 않자 10월 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등과 독립운동 거사 계획에 참여하는 동시에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1921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위해 한때 귀국해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모금하여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으며, 이 무렵 한당사령부장을 맡게 되었다. 1922년 11월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시영, 이동휘, 조소앙, 김원봉 등과 의논해 조선총독 및 주요 관공서에 대한 암살 및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는데, 1923년 1월 사이토 마코토가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도쿄행을 기회로 총살하려는 계획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안홍한을 수행시켜 권총 4정과 실탄 수백 발, 대형 폭탄은 의열단에서 맡아 김한으로부터 받기로 하고 안동현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경성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김상옥은 상하이를 떠나면서 농부 차림으로 변장하고 밤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면서 경비경관을 사살하였고, 신의주에 들어와서는 세관검문소 보초를 권총으로 머리를 때려눕히는 등 격투 끝에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이후 서울에 와서 김한, 서대순 등 동지들과 만나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으나, 상하이 주재 일본 경찰의 통보로 일제가 경계를 강화하자 총독 암살 거사는 시일을 끌게 되었다. 1923년 1월 12일 밤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는데, 이 폭발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큰 소동이 났다.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경성검시국의 오하라 검사가 나서 수사했지만, 의거 당시만 하더라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1월 17일 일본 경찰은 의거의 장본인을 알아내고 은신처를 추적하였는데, 1월 17일 새벽 3시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이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와사부로에게 탐지되었다. 종로경찰서 우메다와 이마세 두 경부의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는데, 고봉근의 행랑방에 있던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탄로난 것이다. 은신처가 탄로나자, 김상옥은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한 다음에는 이마세와 우메다 경부를 사살하고 다른 일본 경찰 수 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에, 추격하는 일본 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가옥의 옥상을 뛰어 다니며 도주했다. 일본 경찰은 군대까지 불러 산을 포위했지만 김상옥은 눈 덮인 남산을 거쳐 금호동에 있는 안장사에 이르러 스님에게 승복과 짚신을 빌려 변장하고 교묘하게 산을 내려왔다. 1월 18일은 무내미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월 19일 새벽 삼엄한 일본 경찰의 경계망을 피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하며 동상도 치료하는 등, 앞으로의 거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1월 22일 새벽 최후의 은신처마저 일본 경찰에 탐지되고 말았다. 상하이로부터의 서신이 효제동으로 온 것을 전해 준 전우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어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은신처가 발각된 것이다. 1월 22일 5시 반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가 총지휘관이 되고 보안과장 후지모토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곳의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렸다. 기마대와 무장 경관 400여 명이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왜경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김상옥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자 권총으로 무장한 다음 방 안 벽장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었는데, 구리다 경부가 방으로 들어와 벽장 안을 열어젖히고 들어오자 김상옥은 그를 가장 먼저 사살했다. 이후 벽장과 붙어 있던 집 벽을 뚫고 순식간에 옆집 74번지를 지나 76번지로 피신하였으나, 겁에 질린 76번지 집주인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자 다시 담을 넘어 72번지로 갔다. 이후 담벼락을 지탱해 권총 2자루로 무려 3시간 반 동안이나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마저 떨어지자 벽에 기댄 채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마지막 1발을 스스로의 머리에 쏘아 자결해 순국하였다. 김상옥은 순국하고 나서까지도 일본군들을 떨게 했는데, 눈을 뜬 채로 사망하여 그의 시신을 본 졸개들이 두려워하여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어머니를 불러다 생사를 확인하게 하였다. 나중에 김상옥의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했을 때 확인한 결과 몸에는 총 11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결에 사용한 두부의 1발을 제외하면 10발의 총알을 맞은 것이다. 신념은 총알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한 셈. 이 과정에서 구리다 경부를 위시한 수많은 경찰 간부가 사살되었고 일본 경찰 16명이 사상당했다. 수백여 명의 추격을 받은데다, 총격전이 3시간 반이나 벌어졌음에도 피격당한 총알이 10발밖에 안 된다는 것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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